
스무 살 무렵, 서울에서 만난 친구들이 나의 고향 합천을 여행한 적이 있다.
햇살이 따사롭게 쏟아지던 그 여름날, 초록 능선을 따라 걷던 시간은 지금도 기억 속에 선명히 남아 있다.
2025년 6월 어느 날, 오십을 몇 해 둔 친구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때 우리, 합천 여행 참 좋았잖아. 다시 한 번, 합천 가볼까?”
그 한마디에 우리는 흔쾌히 짐을 꾸렸다.
아이들과 남편은 잠시 뒤로 하고, 우리만의 1박 2일 추억 여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초록으로 물든 황매산에서 다시 웃다
서울을 아침 일찍 출발해 도착한 첫 장소는 바로 황매산.
철쭉과 억새사이 관광안내소에 도착해 차를 세우자, 산등성이를 따라 완만하게 펼쳐진 능선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20대의 우리가 그랬듯, 능선을 따라 걷고 싶었지만 , 전망을 바로보는 것만으로도 행복이 밀려왔다. 바람에 머리는 흐트러지고, 우리는 장난처럼 자유인이 되어 서로의 머릴 쓸어주며 깔깔 웃었다. 마음은 어느새 스무 살의 그날로 되돌아가, 세상 모든 것이 설레고 가볍기만 했던, 아무 이유 없이도 웃음이 터지던 그 여름날 속으로 스며들었다.
황매산은 철쭉의 계절엔 핑크빛, 가을이면 은빛 억새로 물든다. 이번엔 초록빛이 가득한 여름의 황매산이었다.
멀리 BTS RM의 ‘들꽃놀이’ 뮤직비디오 촬영지 전망대도 보였다. 먼 곳을 보며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 시절 우리처럼 자유롭던 마음을 꺼내보았다.
커피 한 잔, 그리고 바람 한 모금 – 인얼스 카페
자연이 넘나드는 특별한 공간, 황매산 풍경 속 인얼스 카페에 들렀다.
실내보다 오히려 노천의 야외 테이블이 더 좋았다.
커피 한 잔과 함께 눈앞에 펼쳐진 황매산 능선을 바라보며, 잠시 아무 말 없이 바람을 마셨다.
커피 잔에 얼음이 녹는사이 스무 살의 기억이 아른거리듯 떠올랐다. 잠시 침묵이 흐르던 그 순간, 한 친구가 조용히 말했다.
“그땐 몰랐지… 이런 게 진짜 여유였다는 걸.”
그 말에 모두가 파란하늘을 올려다 보았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서울이 고향이 아니었던 우린 많은 시간을 자신만의 길을 만들며 세차게 지나왔고, 그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고, 연습조차 할 수 없었던 인생의 무대에서 크고 작은 실수에도 꿋꿋이 버텨내며 여기까지 왔다. 그렇게 살아낸 지금의 우리는 그 누구보다 멋지고 당당한 모습이라는 걸 알고 있다.
“앞으로도 우리는 잘 살아갈 거야”라는 굳은 믿음을 나누었다.
추억을 담백하게 채우다 – 합천댐 북어마을집
배가 고파질 즈음, 언니가 추천한 북어마을집으로 향했다. 합천댐 인근에 있는 이곳은 예약을 해두면 기다리지 않고 바로 이 집만의 건강하고 담백한 맛을 즐길 수 있다.
상 위에 오른 콩나물 북어찜과 두툼한 시골 두부, 그리고 정갈한 반찬들. 화려하지 않지만 진심이 담긴 한 끼는 여행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시간이 되었다.
“서울에선 이젠 보기 힘든, 작고 투명한 유리병 속에 담긴 환타와 콜라, 사이다가 눈에 띄는 순간, 잊고 지냈던 추억의 감각이 스며들었다. 병뚜껑을 여는 ‘퍽’ 소리와 함께, 여름 햇살 아래 친구들과 웃고 떠들던 20대의 장면이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별이 내려앉는 곳 – 합천운석충돌구 대암산 전망대
합천운석충돌구 전망대가 있는 대암산 정상을 가기위해 꼭 원당마을을 거쳐야 갈 수 있다. 그 마을에 아빠가 살고 있는 시골집이 있다. 몇해전부터 나는 꽃과 나무를 심기 시작해 이제 제법 정원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슬기로운 시골생활을 시작한 후 친구들이 늘 오고 싶어했던 시골집 마당에 모닥불을 피우고, 고기를 구웠다.
고기 익는 냄새, 장작 타는 소리, 그리고 친구들의 웃음소리가 어우러지는 저녁. 그 위로 하나둘 별이 하늘에서 쏟아지기 시작했다.
밤 11시, 우리는 무서움과 조금의 두려움을 모르체하고 차를 타고 합천운석충돌구 대암산 전망대로 향했다. 우리 외에는 아무도 없었던 대암산 정상.
마을의 불빛이 하나둘 꺼지고, 세상은 어둠과 고요만으로 채워졌다.
전망대에 도착하자, 하늘에는 수천 개의 별들이 마치 우주가 쏟아진 듯 흩어져 있었다.
합천운석충돌구 아래 작은 마을들의 가로등 불빛과 벌레퇴치불빛만 어둠 속에 조용히 반짝이며, 외계 도시를 닮은 신비로운 야경을 만들어냈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그 별빛과 지구의 흔적 사이에 오래도록 머물렀다. 그 밤의 시원한 바람, 야경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았다.
대암산에서 내려다본 충돌구는 계절마다 옷을 갈아입는다.
겨울과 봄엔 초록빛 양파밭과 마늘밭이 고요히 펼쳐지고,
여름이면 푸른 벼가 물결치고,
가을이면 황금빛 들판이 바람에 일렁인다.
풍경은 해마다, 계절마다 달라지지만 그곳을 바라보는 내 마음 속 풍경 하나는 언제나 그대로다.
어린 시절, 계절은 언제나 바쁘게 흘렀다. 우리 가족의 살림은 넉넉하지 않았지만, 그 모든 순간은 사랑과 다정으로 가득 찬 시간이었다.
모내기가 한창이던 어느 해 6월.
아빠는 논에서 모를 심다 말고 계곡으로 내려가 우리와 함께 산 가재를 잡았다.
논 옆 농로에서 가재를 손질해 식용유, 소금, 고춧가루를 넣어 맛있게 볶아주셨고, 보글보글 아빠표 라면을 만들어 주셨다.
그날의 맛, 그날의 웃음,
그리고 아빠의 젖은 손과 머리위로 스며들던 햇살을 나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6월이 오면, 문득 그날이 떠오른다. 짧은 캠핑의 시간처럼 기뻐하던 나, 그리고 그런 우리를 바라보며 웃던 다정다감했던 엄마와 아빠의 모습이 계절의 기억처럼 다시 가슴 깊이 피어난다.
합천 운석 충돌구는 한국지질자원연구원에 의해 한반도 최초, 동아시아에서는 중국에 이어 두 번째로 공식 확인된 운석 충돌 흔적이다. 약 5만 년 전, 지름 200m의 거대한 운석이 지표에 충돌하면서 타원형의 분지를 형성했다. 이 충돌구는 동서 약 7km, 남북 약 4km에 이르는 광대한 규모로, 대암산, 작은 대암산, 단봉산, 미타산, 천황산 등 여덟 개의 봉우리가 형제처럼 어깨를 나란히 한 채 둘러싸고 있다.
최근 합천운석충돌구 능선을 따라 올레길이 조성되면서, 서울에서 출발하는 버스투어도 생겼다. 주말이면 마을 앞길로 여행자들이 하나둘 지나가고, 낯익은 풍경 사이로 새로운 발걸음이 스며든다. 대암산 정상에서는 패러글라이딩을 즐기는 이들이 푸른 하늘을 유영하며, 구름 사이를 누비는 형형색색 날개들이 특별한 하늘 풍경을 완성한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여행자의 마음은 한껏 가벼워진다.
시간을 품은 고장, 합천의 역사를 만나다 – 합천박물관
합천을 여행하다 보면, 우연히 마주한 박물관 하나가 발걸음을 붙잡는다.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시간의 켜를 차곡차곡 담아낸 합천박물관. 그곳엔 청동기 시대의 도구들부터 가야의 유적, 삼국시대 고분 문화까지, 시대를 아우르는 유물들이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건, 합천 옥전 고분군과 관련된 전시다. 잊힌 듯 보이던 가야의 찬란한 문화가 유물 하나하나에 고스란히 담겨, 오랜 세월을 건너 내 앞에 선 듯한 느낌을 준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색다른 기획전이 열리고, 가족 단위의 관람객들부터 역사를 사랑하는 이들까지 조용히 박물관 안을 거닐며 시간을 여행한다. 어떤 날은 역사보다 더 오래된 추억 하나를 꺼내보는 시간이 되기도 한다.
고요한 합천의 풍경 속, 작지만 깊은 울림을 주는 공간. 그곳이 바로 합천박물관이다.
낯선 길 위에서 우연처럼 마주한, 세계 최대 규모의 운석 충돌구.
하늘과 맞닿은 황매산 능선 너머로 바람은 부드럽게 불어오고, 박물관 속엔 먼 시간을 건너온 유물들이 조용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무엇보다도, 함께 웃고 걷고 감탄했던 친구들의 옆모습이 이번 여행을 더욱 따뜻하게 채워주었다.
짧지만 진하게 스며든 1박 2일, 합천에서의 시간은 바쁘게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 잊고 지냈던 감정, 여유와 설렘, 그리고 소중한 사람들과의 교감을 다시 꺼내어 내 마음 한편에 놓아주었다.
다음 여행에서도 그날처럼,
함께 웃고, 함께 걸으며, 또 하나의 기억을 쌓아갈 수 있기를.
우리의 청춘은 끝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도, 계속 진행 중이다.
그리고 그 여정의 한가운데, 우리는 함께였다.